#4

“헐, 사하라다~!”

문득 포켓치 화면을 확인한 운명의 낯빛이 환하게 물들었다.

이곳에 오고서부터 보여준 표정 중 가장 밝은 표정이구나, 그런 생각이 그의 오랜 악우의 뇌리를 스친다. '사하라'라,

“그게 뭔데?”

“응?”

“사하라라는 거.”

“‘거'라니, 실례네~!” 충격이라는 양 오버액션을 하며 땍떅거리는 운명의 모습을 뜬눈으로 쳐다봤다. “사하라는 내 친구야! 사진을 잘 찍구~, 무지 다정해.”

“헤~” 그녀는 흐린 날의 다탱구 같은 표정으로 코웃음 쳤다. “친구라고~? 포켓몬이야?”

“난 인간 친구도 있거든~? 누구랑은 달리!”

물리공격을 받아넘기는 럭키처럼 그녀의 디스를 가볍게 받아넘긴 운명이 (마음이 든든해지는 친구들이 정말로 있는 걸! 마음의 중심에 믿을만한 것이 있으니 어설픈 도발에는 조금도 동하지 않는다) 그대로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만나기로 했어! 보라시티에서!”

“언제?”

“보면 몰라? 지금 당장이야!”

“뭐라구?”

“지금 짐 챙겨서 나갈 거니까~ 쿠키 잘 먹었어!”


호다다닥, 운명이 쏜살같이 마당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머물던 방은 2층의 다락방. 캐리어에 챙길 짐은 많지도 않다. 여벌 옷 한 벌, 잠옷―

“야, 뭐가 그렇게 급해!”

그녀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흐아아악! 깜짝이야!”

“아직 짐은 챙기지 말아 봐.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너한테 생각이 있다고?”

“당연하지! 미스·뷰티플라이는 언제·어디서나 한결같이 슬기롭다!”

“…… 그래서 생각이 뭐길래?”

“어차피 너, 한 번에 데리고 다닐 수 있는 포켓몬은 여섯 마리까지잖아.”

“그렇지.”

“근데 너, 다탱구를 데려갈 거잖아.”

“그러기로 했지.”

“그럼 파티에 총 몇 마리야?”

“흠? 패리퍼, 너트령, 두빅굴, 로파파, 피카츄, 코터스, 다탱구……”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세던 운명이 퍼뜩 깨달았다―

“아! 일곱 마리!”

“…… 그래서 한 마리를 박스에 넣어두느니, 차라리 여기에 맡기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

“…….”

그녀의 제안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소중한 포켓몬을 남의 손에 맡기는 일 따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

“뭘…… 그렇게 보니? 안 뺏어가거든요.”

“아니, 나도 안 뺏기거든!”

우리는 참 오랫동안 트레이너였다.

“우리 애들은 나를 제일 좋아하거든!?”

들고 있던 옷가지를 마저 접어서 캐리어에 넣었다. 아직 남은 물건은 있었다.

  그렇지만, 나머지는 나중에 돌아왔을 때 챙기면 되려나.

  “믿을 수 있으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괜찮은 생각인 거 같아.”

  “항상 슬기롭다니까요~?”


* * *


마당은 포켓몬 열두 마리가 뛰어다녀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넓었다. 잔디마을의 가장 큰 장점은 넓은 평지였다. 패리퍼의 잔비가 두 마리의 가뭄에 당해내지 못해, 날씨는 맑음이었다.

“난 지금부터 잠시 보라시티랑~ 111번 도로의 사막에 다녀올 거야! 사막은 험난하고 뜨겁지만, 우리만큼 뜨겁지는 않지!”

폭염 아래서 싸워온 포켓몬들에게는 사막의 더위 따위 우스운 것이다.

“새로운 포켓몬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재밌을 거야! 나랑 같이 갈 사람~?”

빙 둘러보면, 일찍이 약속했던 다탱구가 가장 먼저 부채를 펄럭이며 훌쩍 다가왔다. 그런 다탱구를 지켜보던 불비달마가 이윽고 눈썹의 불꽃을 불태우며 콩콩 따랐다. 머뭇거리던 엘풍은 두둥실 거리를 두었다. 나인테일은 털을 고르고 있었다.

“… 다탱구랑 불비달마랑 교체해줄 사람?”

쭈뼛거리면서도 미네랄이 느릿느릿 기어 나왔다. 신들과의 싸움에 휘말려 돌볼 새가 없었던 그간, 미네랄은 지쳐 있었다. 통제광인 텔로토마톤과의 마찰을 천관산이 발 벗고 나서 해소했었으나 분명 그것으로 충분할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텔로토마톤이 아닌 끊이지 않았던 무거운 배틀에 있었다. 미네랄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미네랄이 나서자 천관산이 덩달아 쿵쿵대며 따라나섰다. 오랜 의리도 있었거니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천관산의 취미 중 하나이기도 했다.

“…… 그러면 네 로파파와 너트령을 임시로 내 다탱구와 불비달마와 교체해줄게.”

운명이 끄떡였다. 하지만 그 전에 마지막으로―

“블레이범, 안 올 거야?”

비록 우리가 떨어져 있던 시간이 함께 여행한 시간보다 길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파트너잖냐.

“……블레. 추억 팔지 마라, 명.

“저기, 무드 깨지 말아줄래?!”

블레이범이 풀쩍 뛰어올라 운명의 곁으로 다가갔다―정확히는, 몸통박치기로 쓰러뜨렸다. 쓰러진 제 트레이너의 뺨을 핥고는, 블레이범이 말했다. 말려도 갈 거야.

운명이 조금 웃음을 터뜨리며, 첫 번째 파트너의 잘 다듬어진 털을 헝클며 쓰다듬었다.

“왜 이제야 왔어~?”

따뜻한 체온에 얼굴을 파묻었다. 블레이범의 불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이 심장에서부터 심장으로, 곧장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말할 필요도 없으니까.


* * *


마지막으로 보라시티에 왔을 때는 미스·뷰티플라이와 함께였었다. 거대한 미궁 같은 도시를 그녀의 도움 없이 헤쳐나가기란…… 운명은 숲과 동굴들을 지나왔듯이 보라시티를 헤맸다.

도시 전체이기도 한 건물을 두 바퀴 반쯤 돌아서, 간신히 운명은 보라시티 체육관을 발견했다. 빛이 난다고는 해도, 낮의 각주탑은 그다지 도움이 되는 랜드마크가 아니었다.

피카츄와 함께 숨을 몰아쉬며 체육관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자,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하라~!”

남자는 담뱃불을 끄고, 단숨에 다가오는 트레이너와 피카츄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여상스러운 미소가 영락없는 사하라였다.

“운명 씨, 기운이 넘치시는군요.”

사하라의 시그니처 스마일에, 운명은 왠지 잔모래마을의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말았다. 제 부모를 닮아 의욕이 넘친다고 하는 말을, 운명은 받아치곤 했다.

“별로, 꼭, 그렇지도 않아!”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엄청나게 헤맸어!―그치, 사이다? (피카츄가 끄떡거렸다)―무슨 도시를…… 이렇게 만들어놓지?!―헉헉.―사하라는 오는데 괜찮았어?”

“그만큼 지도가 여기저기에 붙어있으니까요. 험지에 익숙하기도 하고……” 사하라가 목에 걸린 카메라를 가볍게 들어 올려 보였다. 그라면 복잡한 도심 속에서도 사람의 틈에 섞인 포켓몬의 명장면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운명 씨는 지도를 어려워하는 타입이신가요?”

“어떠려나~ 그래도 축복시티에서는 이렇게 헤맨 적 없는데, 보라시티는 완전 빙글빙글 돌았어~! 지쳤다……!”

“많이 피곤하시다면, 111번도로는 다음으로 미룰까요?”

“그건 안되지!”

“후후, 의욕적인 모습, 좋습니다……”

사하라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붉은 렌즈의 고글을 꺼냈다. 비닐에 감싸여진 신품이었다.

“그런 당신을 위한 오늘의 선물이에요.”

박사님에게 몬스터볼을 받는 아이들처럼, 운명의 손에 고글이 쥐어졌다.

“고고고글!!”

확실히 고고고글이었다!

        물건을 건넨 사하라가 잔잔하게 웃었다. 본래의 계획은 사하라와 합류한 뒤에 보라시티의 안경점에서 함께 고고고글을 구한 뒤 사막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운명은 원래 계획보다 조금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고, 조금 일찍 도착한 사하라는 백화점에 다녀오겠다고 했었다.

고고고글을 가방에 넣은 운명이 사하라의 두 손을 꼬옥 붙잡고 위아래로 슉슉 흔들었다.

“진짜 고마워! 그리고 늦어서 미안!”

지각에 대한 늦은 사과도 덧붙였다. 괜찮다는 말 대신, 사하라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럼 가볼까요? 저도 간만의 사막이라서,” 사하라가 렌즈 캡을 쓰다듬었다. “이래 봬도 제법 기대하고 있답니다?”


* * *


“물 없는 바다 같아~!”

신오지방의 228번도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가 첫인상이었다. 사하라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나 웃음도 잠시, 다음 순간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관찰하는 사하라는 흡사 찌르호크 같아졌다. 그리고 그런 위협적인 분위기의 사하라를 슬금슬금 피하는 캠프걸과 캠프보이들을, 사하라도 운명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하라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뽀글뽀글, 모래의 표면이 물거품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온통 모래투성이인 사막 속에서 그런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하라밖에 없을 것이라고, 운명이 생각했다.

“저건 뭐야?”

“쉿.”

짧고 굵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신호가 내려왔다. 운명은 반사적으로 바짝 긴장하고 입을 꾹 닫았다.

“지느러미 끝을 잘 보세요.”

조곤조곤 설명이 이어졌다.

“딥상어동이에요. 살금살금 다가가지 않으면 들키겠지요.”

카메라를 들고 상체는 조금 굽힌 자세로, 발소리를 죽여 걷는 사하라도 또 한 마리의 포켓몬처럼 보였다. ‘고글 너머로 카메라 화면이 보이기나 하는 걸까.’  연구실에서 안경과 보안경을 겹쳐 쓰는 연구원들을 봤던 게 생각났다. 그건 어떤 시야일까 상상하며, 운명도 살금살금 다가갔다.

    찰칵, 찰칵, 찰칵……

    사하라의 렌즈에 모래를 헤치는 딥상어동이 잡혔다. 어떤 순간들에는 늠름한 눈빛과 태양광을 받아 번들거리는 가죽이 찍혔고, 어떤 순간들에는 딥상어동의 형상을 알아보기도 쉽지 않았다. 연기처럼 부글부글 피어오른 희뿌연 먼지가 베일처럼 딥상어동의 몸을 감쌌다. 그런 장면들은 추상화가 되었다. 사하라는 아낌없이 셔터를 내렸다.

    그러나 정말로 추구하고 있었던 장면은, 딥상어동이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주변을 살피는 바로 이 찰나. 

    일었던 모래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의 딱 한순간.

    한카리아스는 날개를 펼치면 음속으로 날 수 있다고 한다. 음속이 되기 전의 딥상어동이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위쪽에 한 번씩 시선을 주고 나서 다시 모래 속으로 숨기까지는 단 몇 초. 생일에 부는 촛불보다도 빠르게 꺼지는 바로 그 한순간에 사하라는 셔터를 눌렀다.

    ‘빨라.’

    운명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포켓몬이었다면 겁쟁이라기보다는 명랑한 편, 이라고도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느려.’

    그리고, 느리다.

    포켓몬과 비교하면, 블레이범의 반도 안 되는 속도였다. 햇살이 없는 곳에서의 다탱구보다도 느렸다. 자비와 페르네의 한카리아스를 떠올리며, 한카리아스의 경이에 비해서는 초라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느린데도 사진을 찍어보라고 한다면 자신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가장 약한 포켓몬보다도 약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자신과 같은 인간은.

    찌르호크 같은 눈빛과 후딘 같은 집중력으로 딥상어동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아낸 사하라가 천천히 카메라를 든 팔을 내렸다. 땀 한 줄기가 흉터가 진 이마를 타고 내렸다. 입을 조금 벌린 채 숨을 고르는 사하라도 좋은 인물 사진 모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에 열중한 순간의 인간은 포켓몬처럼 찰나에 지나가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 잘 찍혔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자, 사진을 확인하던 사하라가 고개를 들었다.

    “네에, 그런 것 같아요. 운명 씨도 볼래요?”

    “볼래볼래!”


    “대단하다…….”

    “그런가요?”

    “이런 순간이 있었다니, 난 계속 보고 있었는데도 몰랐거든~! 그렇게 빨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사진은 이렇게 선명하게 담아낼 수 있구나…….”

    “조리개를 빠르게 닫았을 뿐이랍니다, 후후……”

    “조리개?”

    “으음…… 운명 씨가 좋아하시는 배틀과 그렇게 다르지 않을지도요. 스피드를 빠르게 하면 더 빠른 피사체를 담을 수 있지만, 그만큼 빛이 많이 들어와서, 사진이 번지기 쉽게 되기도 한답니다.”

    “과연…… 그런데 사하라의 사진은 그렇게 밝지 않은데?”

    “그건 그만큼 렌즈를 조금만 열었으니까요……. 카메라에도 능력치가 한가지 뿐인 건 아니라고 말해둘까요.”

    “호오……, 잘 모르겠지만 알겠어. 깊이 생각해볼게!”

    “후후…… 그러면 이걸로 한 마리째……”

    “한 마리째?”

    “네에, 한 마리째.”

    “세고 있는 거야?”

    “세고 있지요. 여기에 있는 포켓몬…… 전부 찍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요. 후후후후……”

    동굴도 아닌데,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배틀하고 올래.”


* * *


“딥상어동, 돌살이, 톱치, 선인왕, 모래두지, 깜눈크, 오뚝군~……”

나지막히 읊조리는 포켓몬의 이름들은 시구詩句처럼 나열되었다. 박자에 맞추는 안무처럼 카메라에 화상이 지나갔다. 사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하게 한 장인 장면들, 그러나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게 움직이는 장면들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대단해~……”

대단한 사진들을 보고 무어라 평론하기에는 언어가 부족했지만, 대단한 것만은 확실했다. 같은 형용을 반복하는 운명의 모습에 사하라가 웃었다.

“한 장 찍어드릴게요.”

“에, 나?”

“운명 씨랑, 음~…… 다탱구를 찍어볼까요?”

탱구?” 에, 나?

“후후후……” 하며 사하라가 성큼성큼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트릭룸 속의 너트령처럼……

그리고, 땅가르기?

운명은 순간적으로 절각참의 날보다도 날카로워진 사하라의 눈빛을 보고, 사하라 자신이었다면 놓치지 않았을 카메라 찬스라고 생각했다. 주피썬더처럼 빠르게, 사하라가 카메라를 벗어던졌다. 내던지기.

“운명 씨! 받으세요!”

그리고 운명은 자신을 잘 아는 편이었다. 사하라와는 달리 가장 약한 포켓몬보다도 약하고, 가장 느린 포켓몬보다도 느린 자신이었으나, 포켓몬이 함께여서 늘 괜찮았다.

“블레이범!”

블레이범이 고개를 끄떡일 틈도 없이 풀쩍 뛰어서 내던져진 물건을 입으로 잡았다.

단 몇 초의 시간.

사하라는 그새 땅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상반신만을 디그다처럼 내놓은 사하라는 험악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여유로운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한 박자 느리게 상황을 파악한 운명이 화들짝 놀라서 달려드는 것을 제지하는 것은 물론 불비달마의 역할이었다.

“운명 씨까지 빠지면 안 돼요…….”

불비. 비달.

생긋생긋 웃는 사하라와 양팔로 다리를 단단하게 붙잡은 불비달마 사이에서 운명은 강제로 진정했다.

“어, 어떡해 사하라, 계속 가라앉는 거 같아~”

“아뇨, 그렇지는……”

“못 나오는 거야?!”

“지금은 그렇지요……”

“저기 불비달마, 역시 사하라를 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닐까?!” (불비달마는 트레이너의 다리를 꼬옥 붙들고만 있었다).

“운명 씨까지 빠지면 정말로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 그보다 거기서 제 카메라를 잘 간수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아, 카메라!”

코로 운명을 찌른 블레이범이 손에 들고 있던 사하라의 카메라를 트레이너에게 건넸다.

“응……”

사하라의 바람대로 유사流沙로부터 거리를 두고 운명이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멀리서 멀뚱멀뚱 사하라를 마주보기 시작하고서 단 몇십 초, 단 몇 분이 운명에게는 아주아주 길게 느껴졌다.

“…… 사하라는 계속 거기에 있는 거야?”

“이래 봬도 아래에서 부지런하게 다리를 움직이고 있답니다? 후후…… ‘스완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버둥 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하라는 스완나야? …… PP가 부족한 것 같은 얘기라서 안타깝지 않아?”

“눈도, 비도, 순풍도 잠시 기다리면 멎는 법이죠?”

“그렇지.”

“유사의 원리도 비슷하답니다. 이렇게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주면……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해서, 굳은 모래가 다시 녹고……”

사하라가 바닷가에 조난당해서 해안으로 밀려온 사람처럼 유사 밖으로 천천히 밀려져 올라왔다.

뾱, 하는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날 것 같은 광경이었다. 전신이 진흙투성이가 된 사하라는 어느새 다시 지상에 있었다.

“사하라가 돌아왔어~!”

불비달마로부터 풀려난 운명이 한달음에 다가가 사하라를 폭 껴안았다. 그리고 나서 떨어져서 보면, 사이좋게 진흙이 묻어 있었다. 본래 흰 옷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생긴 얼룩이 몇 겹씩 겹쳐 있어서 화석처럼 보였다.

“사하라 대단해~! 전에도 유사에 빠져본 적 있는 거야?”

“……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포켓우드 영화 주인공 같았어!”

“하하…… 그런가요?”

“아, 이거!”

사하라의 손에 올려지는 카메라는 부서진 곳 없이 온전한 모습이었다. 전원을 켜서 기능들을 점검하는 사하라의 표정은 밝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운명 씨…… 그리고 불비달마 씨. 카메라는 다시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아까 찍은 사진들은 이 안에만 들어있으니까요. 어떻게 될까 봐 무척 걱정했어요.”

“다 괜찮아?”

“네에, 덕분에요.”

카메라를 점검한 뒤에야 관절을 하나씩 움직여보며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목과 어깨, 양팔과 양다리, 팔목과 발목, 그리고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어디 하나 고장 난 곳은 없었다.

“그러니, 찍어볼까요?”

다시 또 대여섯 걸음을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뒤로 걷는다. 땅은 굳어 있다.

‘응? 뭘?’ 하기도 전에, 찰칵, 하고 셔터음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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